기리시마 사토시, 반일무장전선 핵심으로 49년만에 자수한 일본 최고의 테러리스트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핵심 인물인 기리시마 사토시(桐島 聡)가 최근 자수를 한지 며칠만에 사망했습니다. 49년 만에 자수한 기리시마는 말기 위암으로 이미 위중한 상태였습니다. 본명 ‘우치다 히로시’로 살아온 그는 생의 마지막을 자신의 원래 이름으로 맞이하고자 했습니다. 오랜 도피 생활 끝에 이루어진 자수로 인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던 중 일어난 사건이었기에 주목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신좌파 테러리스트인 기리시마 사토시는 1970년대 일본에서 활동한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핵심 조직원이었습니다. 이 무장단체는 일본의 전범 기업들을 대상으로 연쇄 폭파사건을 일으켰으며, 기리시마 사토시는 이 사건의 용의자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기리시마 사토시의 행방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인생과 조직 활동에 대해 알아봅니다.

image 15

기리시마 사토시는 누구

기리시마 사토시는 1954년 1월 9일에 태어났으며, 히로시마현립 오노미치북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메이지가쿠인대학 법학부에 진학했습니다. 대학 재학 중에 기리시마는 쿠로카와 요시마사, 우가진 히사이치와 만나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인 ‘전갈’을 결성하게 되었고, 일련의 연쇄 폭파사건에 관여했습니다. 이 무장단체는 1974년부터 1975년까지 미쓰비시중공업, 미쓰이 물산 등을 ‘아시아 침략에 가담하고 있는 기업’이라며 표적으로 삼아 폭발물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1975년 4월 18일, 동경 긴자의 한국산업경제연구소 입구에 기리시마 사토시가 시한부신관 사제폭탄을 설치한 후 다음 날 폭발시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빌딩의 일부가 손상되었고, 폭탄은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늑대’에서 출판한 『복복시계』에 실려 있는 제작법을 따라 제조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기리시마 사토시는 이 외에도 여러 폭파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멤버, 기리시마 사토시의 행방

1975년 5월 19일,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다른 멤버들이 체포되었을 때, 기리시마 사토시는 우가진과 함께 체포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경찰은 조직에서 가장 막내격인 이 두 사람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쿠로카와의 집에서 두 사람의 열쇠가 압수되면서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시청에서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혐의로 기리시마 사토시를 지명수배했습니다. 우가진은 7년 후인 1982년에 체포되었지만, 기리시마 사토시의 행방과 생사는 여전히 묘연한 상태입니다. 기리시마 사토시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멤버 중에서 단 한 번도 체포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으며, 별건의 전과가 없는 멤버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리시마 사토시의 사망

약 49년간 도주 생활을 한 기리시마 사토시는 최근에 자수했으나, 그로부터 나흘 뒤인 29일에 사망했다고 일본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기리시마 사토시를 자칭하는 남성은 가나가와현 가마쿠라 한 병원에서 입원 중이던 상태에서 사망했으며, 말기 위암으로 매우 위중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할 당시에도 가명인 ‘우치다 히로시’를 사용했으나, 지난 25일에 자신이 기리시마 사토시라고 밝혔습니다. 이후 경시청은 그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DNA 감정 등의 조사를 진행하려고 했으나, 사망으로 인해 수사는 사실상 종결될 것으로 보입니다.

image 16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역사와 활동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무정부주의계 급진주의 무장단체입니다. 1972년에 창설되어 1974년부터 1975년 사이에 다수의 폭발물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이 단체는 특히 미쓰비시중공업과 미쓰이 물산과 같은 기업들을 표적으로 삼아, 아시아 침략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미쓰비시중공업 폭파 사건을 비롯해 총 12차례에 걸친 폭발물 사건을 일으켰으며, 미쓰비시중공업 폭파 사건에서는 8명이 사망하고 380명이 부상한 비극적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 단체의 목표는 반제국주의와 반식민지주의를 내걸었으며, 기리시마 사토시는 이 단체의 멤버 중에서도 핵심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기리시마 사토시의 도주와 지명수배

기리시마는 조직의 핵심 인물 중 하나로, 1975년 대부분의 조직원이 체포된 이후에도 2명 중 한 명으로 도주하여 장기간 도피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는 일본 경시청의 역대 중요 지명 수배범 중에서 가장 긴 도주 기간을 기록한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자수와 사망은 일본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기리시마 사토시 사건의 사회적 영향

기리시마 사토시의 자수와 사망은 단순히 한 개인의 운명을 넘어서, 일본 사회와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친 사건입니다. 그의 활동과 도피 생활은 과거의 테러 행위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 대한 중요한 담론을 제공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일본 사회는 과거의 테러 행위와 그 배경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게 되었으며, 이는 현재와 미래의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교훈을 제공할 것입니다.

기리시마 사토시 사건의 의미

기리시마 사토시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멤버로서 일본에서 활동한 신좌파 테러리스트입니다. 그는 1970년대 일본의 전범 기업들을 겨냥하여 연쇄 폭파사건을 일으켰으며, 여러 폭파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9년 동안 기리시마 사토시의 행방은 묘연한 채로 지났으며, 최근에 자수하지만 그로부터 나흘 뒤인 29일에 사망했습니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멤버 가운데 기리시마 사토시는 핵심 인물로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행적과 활동은 일본 역사상 큰 이슈로 남아있습니다.

댓글 남기기

위로 스크롤